60년대 - 70년대의 CM 제작 강릉 문화방송을 비롯한 지방사에서 CM을 제작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자체 제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CM문안을 서울 MBC에 의뢰하며 제각해 오는 방식이었다. 지방의 자체 제작은 비용이 적게들고 신속한 제작이 이루어지는 장점이 있으나 의 측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강릉MBC의 경우에도 다른 방송사 와 마찬가지로 CM제작은 아나운서들에 의해 제작되었다.(80년대말 까지) 그러나 CM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아나운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특히 본방송 자체로 오인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방송국 직원(아나운서)에 의한 광고 방송 금지 권고 사항을 윤리규정 조항으로 채택의 협조로 제작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
1. 총설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영동지역은 과거부터험준한 산악과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1차산업인 농업이 주산업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특히 산간지역의 경우고랭지 채소나 밭작물 위주의 경작 농업지대로 그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영동 동해안 지역은 긴 해안선을 따라 어업이 예로부터 성됐던 지역이다. 물론 강원남부 지역은2차산업인 광공업도 발달했지만 방송광고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올 만큼의 큰 공업단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설악산에 이어 강릉문화방송이 개국하던 해 9월 오대산과 소금강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속초와 함께 강릉도 관광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70년대 눈부신 공업화 대열에서 강원 영동지역은 탈락됨으로서 경제적으로 낙후된 면모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요인은 자연히 광고시장에..
송 · 중계소 KTA 이관과 환원 1984년 10월 30일 동일 고지내의 방송사 송신시설을통합운영하여 한정된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고통합운영에 따른 방송사의 경비 절감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송 · 중계소의 위탁운영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강릉문화방송은 괘방산 TV중계소와 초당 라디오송신소 시설, 그리고 인원 14명이 이관 대상이었다. 통합기간 중 송 · 중계소 근무자들은 방송사 직원의처우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열악하여 처우문제가 대두되었고, MBC 이관요원은 이관 당시 연고지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으나 이관 후 전국을 대상으로 근무지가 변경되어 근무여건에 대한 불만 역시 큰 문제였다. 이러한 불만요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송·중계소 통합운영을 체결한 시점인 1987년 7월 송·중계소 근무자들..
1) 개국 강릉MBC-TN 방송은 낙후된 강원도의 여건과 TV개국을 열망하는 지역민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TVColor 방송이 시작된 1981년 이후에도 2년이 지난 1983년 10월 17일 T'증계소로 개국하여 영동지방에 MBCTN'를 방송 하게 되었다. 그러나 꾸준한 MBC 방송망 확장 사업'을 통하여 1985년 지방도시로서는 울산과 강릉이 TN 연주소를 허가 받아 명실공히 자체방송을 할수 있는 TV 방송국을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1983년부터 서울 MBC-TV 방송을 중계만 하던 것을 강릉시 임당동 85-8번지 구사옥 1층다방 임대)을 개조하여 다목적 스튜디오와 TV 조정실을 시설하였고 전원 시설, 발전기시설, 사무실 등이 개축되어 개국을 준비하였다. 다목적 스트디오에서 뉴스 Localho제작을 겸하..
방송기술 30년 1. AM 방송 1) 개국과 방송기술 강릉문화방송의 전신인 영동방송(YBC)은 1967년 10월 8일 무선국(방송국) 설립에 대한 허가를 신청하여 67년 11월 10일 체신부로부터 전파형식 A310, 주파수 1380, 호출부호 HLSO, 공중선 전력 10Kw, 방송시간04:30-24:00 19시간 30분)으로 방송국 가허가를 취득했으나 호출부호 HLSO는 조난부호 SOS와 유사하고 주파수 1380는 지리적 여건과 타방송사의 혼신 관계로 1968년 5월 16일에 호출부호 HLAF, 주파수 1290h로 변경허가를 받았다. 연주소는 부지를 확보하여 사옥을 신축중인 상태여서 성내동에 마련된 임시 연주소에서 개국 첫 전파를 발사하였다. 강릉시 성내동 12-17번지에 마련된 임시 연주소에는 주 · ..
뉴스앵커의 출현 81년 컬러방송 시작과 동시에 아침방송이 신설되면서 아침 시간대의 주요 뉴스인 [여기는 MBC가 신설된다. 서울에서 방송되는 전국방송 [여기는 MBC에아나운서 출신인 최우철이 보도국으로 옮기면서 고정앵커로 자리를 잡고 이어서 [여기는 MBC에도 기자가앵커로 등장하게 된다. 강릉문화방송 TV개국과 함께 뉴스앵커는 아나운서가 담당했다. 개국당시 여기는 MBC에 김창열, MBC저녁 뉴스는 김용재, MBC 생활뉴스는 여자 아나운서가 담당했다. 그러나 87년 뉴스데스크에 지방 방송시간이 할애되면서부터는 보도국에서 뉴스앵커를 키워야 된다는 논란이 일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뉴스데스크에 보도국 김근배가 앵커로 선정되어 다년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토-일요일에는 문병훈, 최승규 등도뉴스진행 앵커로 활약했..
초창기 뉴스 개국당시 서울 MBC의 뉴스는 시간마다 뉴스가 시보전에 편성되어 19시간 방송중 18회를 방송하였다.[바르고 빠르고 정확한 MBC 뉴스를 표방하고 전국을커버하는 네트워크 체제가 청취자의 욕구를 층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가십성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끈 것은 서을의 [오발탄이었고 영동방송 자체의 가십프로그램은 [레이다 100이었다. BC개국 당시의 19시간 방송시간중 로컬 프로그램의 구성비율은 37.SC 수준이었고 로릴 프로그램의 분야별 구성비율은 보도가 335, 교양이 11.75. 오락이 163 수준이었다. 초창기 로컬 뉴스시간은 아침 6시 50분부터 7시까지 10년간 시브전 뉴스로 시작해 7시 50분, 10시 50분,11시 45분. 오후 6시 50분 등 1일 5회의 로컬뉴스를 처리했다..
1. 보도방송 성향 강릉 문화방송의 보도특징은 신속하고 완벽한 현장증심 취재와 심층보도로 영동지역 시청자는 물론, 전국의 시청자에게도 신뢰와 신선감을 안겨 주면서 강원도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으로 성장했다. 60년대 후반기에 개국한 라디오의 보도는 지역주민의 민원과 소의된 계층의 바램을 심층적으로 취재 보도함으로써 MBC뉴스의 위력과 영향력은 고조강세를 가져왔으며 청취자들의 민원제보 또한 증폭되어 행정당국에서는 MBC보도 관제에 급급했다. 이어 80년대중반에 개국한 TV와 함께 MBC 보도성향은 날이 갈수록 생생하고 다양한 화면으로 현장감을 더해갔다. 초창기 라디오의 경우 오전 11시 40분부터 20분간 뉴스를 방송하고 12시(정오)시보 다음에 가요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시보전 뉴스시간대였다. 이러한 시보..
FM방송 편성 1985년 강릉문화방송 개국 기념일인 6월 2일 강릉MBCAM이 개국을 하여 강릉문화방송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주파수 5W 출력 SK로 오전 6시부터 자정가지 하루 18 시간을 편성한 강릉MBC FM은 당초 11시간의 로럴 프로그램 편성으로 로컬 제작비율이 616를 기록할 만름 대단히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다. 1983년 MBC 계열사 중 춘천을 비롯한 10개사가 FM가국을 하였고 MBC가 AM방송 이미지 제고라는 목표CRM전국화 계획에 따라 1985년도에는 강릉과 여수문화방송에 1986년에 이르러 삼척 문화방송을 비롯한4개 계열사에 EM을 개국함으로써 AM방송망을 전국화았다. AM방송망 확장은 문화방송의 중장기 중점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것이며 EM인구의 저변확대와 국딘 정서 함양에 이바..
텔레비전 편성 1969년 MBC-TV의 개국은 텔레비전 방송의 본격적 경쟁을 예고하여 주었다. 그후부터 방송이라고 하면 의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KBS, MBC, TBC 3국이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시작한 해로서 TV 3사 공히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개발과 편성에 열의를 보였는데 특히 MBC-TV 개국을 전후로 각 방송사가 일일연속극을 편성함으로써 일일연속극 시대의 막을 올렸다고 볼 수 있다. 1980년은 우리 방송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는 동시에 대변혁의 시대로 기록되는 해이다. 1980년11월 14일 한국방송협회와 한국신문협회의 명목상 결의를 빌린 11월 15일의 언론통폐합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방송의 공영정신을 실현한다는 취지 아래 단행된방송통폐합조치에 따..
편성 기구와 편성 실무 편성(rogrumming)을 얘기할 때 개념적으로는 시간대를 정하고 프로그램 타이틀을 정하는 일, 즉 방송순서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을 얘기할 경우가 많다. 광의의 개념은 프로그램 기획에서부터 제작 송출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과정을 통칭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협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1968년 개국 당초의 편성기구를 보면 서울 MBC의 경우 방송부 산하에 편성과 · 제작과 · 아나운서실 · 음악과 등 4개과가 있어서 편성업무는 주로 편성과에서 담당을 했고 강릉MBC의 경우 총무부, 방송부, 보도실, 기술부, 송신소 서울 사무소가 있어서 방송과에서 편성업무를 담당하였다. 편성실무는 방송부 부장이 처리를 했고 PD와 아나운서들의 아이디어가 종합되어 편..
편성 작업과 실제 편성은 개념상 광의와 협의로 구분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협의의 편성, 즉 방송 순서를 결정하는 작업으로 제한하고 제도적으로 어떻게 그 작업을진행해 왔었나를 간추려 보려고 한다. 편성 작업은 기본적으로 방송이 지향해 나가고 있는 목표에 대하여 충실하고 그때그때 정치 · 사회적인상황이나 가치 기준에 따라 내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편성의 틀을 규격화시킬 수는 없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편성의 제도적 변천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 방송의 실제 모습을 단계적으로 고찰해본다. 먼저 일제 치하 방송의 편성인데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을 시작한 경성 방송의 편성 원칙은 조선총독부가 황국 신민화운동을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