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스님 다비식 법주사 엄수 마지막 길

봉은사 전 주지 명진스님이 2026년 8월 25일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서 다비식으로 마지막 길을 마쳤습니다. 지난 22일 제주 서귀포 해상에서 발견된 지 사흘 만으로, 불교계와 시민사회의 추모 속에 법구가 연화대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스님은 1969년 출가 이후 종단 개혁과 사회 운동에 앞장서며 수행자이자 실천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명진스님 다비식의 전 과정과 함께 생전의 행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진스님 다비식 핵심 일정

영결식에서 다비식까지의 시간

명진스님의 장례는 25일 하루 동안 진행됐습니다. 오전에는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영결식이 엄수됐고, 오후에는 법주사로 법구를 이운해 다비식을 봉행했습니다. 법구는 다음날까지 다비된 뒤 수습될 예정이며, 유골은 49재를 마친 후 남양주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됩니다.

구분일시장소
영결식25일 오전서울 봉은사
노제25일 오후 3시법주사 템플스테이관 삼거리
다비식25일 오후법주사 다비장 연화대
유골 안장49재 이후남양주 모란공원묘지

다비식에는 법주사 회주 도봉스님, 율주 무상스님, 주지 정덕스님을 비롯해 300여 명의 스님과 불자, 시민이 참석했습니다. 신용한 충북지사도 참석해 영정 앞에서 절을 올리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다비식의 의미와 절차

연화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다비는 불교에서 육신을 태워 수행의 완성을 기리는 의식입니다. 법주사 다비장에는 장작으로 연화대를 쌓고 그 위에 명진스님의 법구를 모셨습니다. 스님들의 “하화요”라는 외침과 함께 거화봉에 불이 붙었고, 연화대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독송 소리가 다비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모객들은 두 손을 모은 채 극락왕생을 기원했습니다.

이운 행렬은 영정과 위패를 앞세우고 만장을 든 스님과 불자들이 뒤따르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스님의 법구가 연화대에 오르는 순간, 다비장에는 깊은 침묵과 흐느낌이 함께 흘렀습니다. 명진스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명진스님 다비식

수행자이자 실천가로 살아온 삶

출가에서 종단 개혁까지

명진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고, 1974년 법주사에서 탄성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0년대 조계종 종단 개혁 운동을 주도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봉은사 주지를 지냈습니다. 스님은 사회 운동과 종단 개혁을 외칠 때도 매년 방부를 들이고 철마다 선방에 앉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법주사 진공당 탄성 문도회장 도공스님은 영결사에서 명진스님을 두고 “말에 거침이 없고 행동에 물러섬이 없었던 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던 손길”이라고 추모했습니다. 출가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행 정진했던 점을 강조하며 사회운동도 종단 개혁도 결국 수행의 방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낮은 곳을 향한 동체대비의 실천

염무웅 전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은 명진스님을 “이 시대의 위대한 정신”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제도와 관행이 그를 가두지 못했고, 정권의 탄압과 종단의 만류도 그를 막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언제나 힘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인물로 기억했습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스님이 1985년 해인사에서 광주민주항쟁의 참상을 접한 뒤 선방의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나왔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세월호와 용산참사 유가족, 비정규직과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곁을 지켰습니다. “동체대비의 실천이야말로 참된 수행”이라고 말했던 스님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영산의 춤’이라는 추도시를 통해 명진스님을 기억했습니다. 기적이자 불생불멸의 반야, 바람과 같았던 스님의 자유로운 삶을 노래했습니다. 장사익의 추도가와 봉은사 합창단의 조가가 영결식장에 울려 퍼졌고, 종단 스님들과 유가족, 시민사회, 신도대표가 차례로 헌화했습니다.

명진스님 다비식과 추모의 흐름

명진스님 다비식은 단순한 장례 절차를 넘어, 스님이 걸어온 삶을 돌아보는 자리였습니다. 영결식에서는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세월호 유가족, 정의평화불교연대, 전재수 부산시장 등 각계 인사들이 조사와 추모를 이어갔습니다. 불교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애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스님은 지난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발견됐습니다. 법구에 특별한 외상이나 범죄 혐의점이 없어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이들이 충격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법주사 다비식 현장에서 나는 독송 소리와 추모객의 흐느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모든 순간이 엄숙하고도 진중하게 진행됐습니다. 명진스님이 남긴 자취는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쉴 것입니다.

다비식은 불교의 전통 의식이지만, 명진스님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평소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섰던 스님의 삶을 되새기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보여준 수행자의 모습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번 명진스님 다비식은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봤습니다. 뉴시스의 다비식 현장 기사 보기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비식 이후의 일정

명진스님의 법구는 26일 오후까지 다비된 뒤 수습됩니다. 유골은 49재를 마친 뒤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이는 스님이 생전에 민주화 운동과 사회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삶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님의 유산을 기억하는 방법

명진스님의 삶을 돌아보면, 수행은 결코 정진(靜塵)한 방 안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스님은 세상의 고통과 맞닿을 때 비로소 수행이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과 행적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양심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비식 영상과 사진을 접하면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화대에서 피어오른 불길처럼, 스님의 가르침도 우리 곁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해 걸었던 수행자의 길을 잊지 않겠습니다.

명진스님 다비식을 끝으로 한 시대의 큰 스님이 떠났습니다. 다만 그의 삶이 보여준 것은 나눔과 연대의 가치입니다. 독송 소리가 울려 퍼지던 법주사 다비장의 풍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의 원적 소식에 많은 이들이 갑작스러움을 전했습니다. 22일 발견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이나 범죄 혐의점이 없다고 밝혔고, 부검 없이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마무리

명진스님의 다비식은 25일 하루 동안 영결식과 노제, 다비를 거쳐 엄수됐습니다. 봉은사에서 시작해 법주사로 이어진 마지막 길에 수많은 사람이 함께했습니다. 스님의 법구가 연화대에서 불태워지는 순간, 하늘로 오른 불길처럼 그 정신도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유골은 49재를 마친 뒤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명진스님의 삶을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가는 것이 진정한 추모가 될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명진스님은 언제 발견되셨나요?
A: 지난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물에 떠 있는 채 발견됐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원적에 들었습니다.

Q: 명진스님 다비식은 어디서 진행됐나요?
A: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다비장 연화대에서 봉행됐습니다. 스님의 출가 본사인 법주사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른 것입니다.

Q: 명진스님의 유골은 어디에 안장되나요?
A> 49재를 마친 뒤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스님의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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